[긴급] KBS의 공연 중 '팀파니'가 찢어졌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1번과 오감도의 시인 '이상')

[1]KBS교향악단 팀파티가 찢어진 순간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1번‘1905년' (2023.3.15.)

[2]상기의 공연 전체; D. Shostakovich / Symphony No.11 - conducted by Eliahu Inbal (2023.2.23.)


[KBS교향악단 제787회 정기연주회]
▶ 출연 : 엘리아후 인발(지휘)
▶ 일시 및 장소 : 2023년 2월 23일(목) 오후 8시 / 롯데콘서트홀
▶ 프로그램 :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제11번 g단조, 작품103 ‘1905년’

0:22 1악장 궁전 앞 광장(The Palace Square)
12:34 2악장 1월 9일(The 9th of January)
23:34 2악장 하이라이트 빌드업
25:33 ★2악장 하이라이트(팀파니)
30:04 3악장 추도(In Memoriam)
39:13 4악장 경종(The Tocsin)
49:52 ★4악장 하이라이트

때는 1905년 1월, 러시아는 지속된 전쟁 패전으로 노동자들은 말도 안되는 높은 세금과 장시간 노동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결국 굶주린 시민 6만명이 겨울 궁전 앞 광장에 집결하였고 비무장 상태로 황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평화적인 시위를 했지만 황제의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4000여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이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음악으로 표현한 곡이 쇼스타코비치의 제11번 교향곡 중 2악장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표제를 붙인 최초의 교향곡으로,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 교향곡의 모티프를 얻어 전진하는 민중의 목소리, 친위대의 총격, 비애의 장송곡까지 혁명의 모든 과정을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그려냈다.

[KBS SO The 787th Subscription Concert]
▶ Artists : Eliahu Inbal(Cond)
▶ Date and Venue : Feb. 23th(Thu), 2023, 8pm / Lotte Concert Hall
▶ Program : D. Shostakovich / Symphony No.11 in g minor, Op.103 'The Year 1905'


시인 이상(李箱,1910~1937)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서울에 태어났다. 그의 필명으로 '이상'으로 썼고 이름의 '상'은 '생각' 상(想)이 아니라 '상자' 상(箱)자를 썼다. 

그의 백부 '김연필'은 본처 사이에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동생의 큰 아들 '김혜경'을 1913년에 3살 나이에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우고 학업을 시킨다.

하지만 백부는 후에 새 여자를 데려왔고, 원래 백모는 집을 나간다. 백부가 데려온 새 아내 김영숙에게는 전 남편의 아들 '문경'이 있었고, 이에 새 백모 김영숙은 '이상' 김혜경과 '문경'과 차별하여 홀대하였다.

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이상(김혜경)은 1930년대 국내에서는 선구적인 모더니즘 작가로서 약 6년간 다수의 시, 소설, 수필을 집필하며 인간 사회의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고 미적 자율성을 정립하고자 했다.

이상의 작품 활동은 한국 근대 문학이 새로운 흐름에 합류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초현실주의와 심리소설의 개척자로도 높이 평가받는 반면에, 인간의 인식가능성을 부정한 극단적인 관념론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해 경제 사정이 힘들었다. 초현실주의 실험작인 『오감도』 등을 투고했을 때에는 독자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발표 당시에는 오직 그의 지인들만이 이상을 천재로 평가하면서 그의 사후에 조국 해방과 함께 그의 뛰어난 능력이 발굴되었다.

이상은 1930년, 조선지에 연재된 장편 소설 12월 12일로 문학계에 데뷔했다. 이듬해인 1931년 7월,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BOITEUX·BOITEUSE', '공복' 등의 일본어 시들이 수록된 <이상(異狀)한 가역반응> 이라는 첫 시집을 냈다.

1931년 8월, 일본어로 쓴 시 '오감도(烏瞰圖)' 와 '삼차각설계도'를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오감도 발표 해에 백부가 죽자 이상은 친가로 돌아가 친아버지 밑에 살게 된다.

친부 '김연창'은 구한말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절단되어 활판소 일을 그만두고 집 근처에 이발관을 개업, 가계를 꾸렸다.

친부는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가난한 '이발사'였는데 양반이라는 자존심이 강했던 '백부의 집'에서 자란 이상은 오히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친부와 친가족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이상은 이 당시 자신의 모습을 <슬픈 이야기>라는 수필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생가는 종로구 통인동(현재 효자동)에 있어 지금은 '이상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이상의 생가를 현대적으로 복원하여 현재 생가에서 이상의 생애와 작품들을 알리고 있다. 생가로 가면 이상이 살아서 지은 시들과 소설, 삽화의 스캔본을 열람할 수 있다. 


이상은 문학 잡지 '구인회'의 편집자로 일하기도 하였고, 문학가로서의 데뷔작인 12월 12일, 휴업과 사정 등은 평범한 단편 소설이다. 

그의 대표 시들은 21세기에 읽어도 너무 해괴하고 난해한지라 "그냥 이거 아무 의미 없이 휘갈겨 쓰고 사람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 아니냐?"라는 소리도 있으나 학계의 전반적인 해석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이다.

또한 이상이 시를 아무 계산 없이 썼다고 하기에는, 그의 글들이 서로 맞닿아 상통하는 부분이 너무 자명하다. 비록 평소 행동은 좀 괴짜스러웠을지라도, 문학가로서의 이상은 언제나 차분하고 진지했던 것이다.

1932년 '비구(比久)'라는 가명으로 소설 '지도의 암실',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내면서 문학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던 차에 건축기사 일을 하던 이상은 새로 부임한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상은 1933년 심한 각혈 증세를 겪고, 병원에서 폐결핵 진단을 받는다. 폐결핵을 진단받은 이상은 곧바로 건축 기사일을 그만 두었다.

1936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변동림'과 결혼한 이상은 서구화된 문물에 익숙해지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해 1937년 어느 날, 무작정 도쿄로 떠났으나, 도쿄에 도착한 후 폐결핵이 악화되었고 막상 도쿄에 대한 실망과 환멸감을 느껴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상은 조선에 편지를 보내 "다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적었다. 햇빛도 들지 않는 도쿄의 싸구려 방에 홀로 은거해 버렸지만, 일본에 온 지 몇 달도 안 된 1937년 2월, 도쿄에서 불령선인(사상불온조선인혐의)으로 체포되어 도쿄 경시청에 구금되었다.

그러나 심한 폐병 때문에 보석으로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가 동경대 부속 병원에서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에 이상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 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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